개인정보보호법 제정,
인터넷 실명제 위헌 판결까지.
90년대의 정보화가 정보통신기술의 사회적 보급과 확산에 따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영역에서 일어난 다종다기한 변화를 이야기한다면 진보적 사회운동도 정보화라는 사회변화에 자유롭지 않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80년대 중반 처음 등장한 PC통신은 소수의 몇몇만이 사용하는 서비스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많은 사회단체들이 폐쇄이용자모임(CUG)을 운영하고 있으며 많은 활동가들이 통신 아이디(ID)를 가지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진보운동에게도 대중적인 매체이자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1997년 1월 노동자 총파업과 함께 진행된 총파업 통신지원단의 활동은 네트워크가 국경을 넘어서는 조직가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 한 극적인 예이다.
그렇지만 PC통신이나 인터넷이 보다 대중적인 매체가 되어가는 만큼 정치적 검열과 탄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정보화가 진보적 사회운동에 의미를 갖는 것은 자본과 국가가 주장하는 정보화의 장미빛 미래 때문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통해 전세계 민중들이 만들어내는 지역과 국경을 넘어선 풀뿌리 연대이고 이것으로부터 싹틀 희망의 미래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회운동의 정보화 과정을 돌아보면 연대와 희망의 미래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스스로의 계획과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현재 사회운동이 이룬 정보화는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 국가 혹은 뉴미디어자본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자본과 국가의 정보화는 언제든지 감시와 억압의 네트워크로 바뀔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을 경계하고 사회운동 스스로의 계획과 힘, 그리고 진보적 사회운동의 원칙 위에 사회운동의 정보화를 이루고자 진보네트워크센터의 설립을 제안한다.
우리는 진보네트워크센터의 건설을 통해 자본과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롭고, 또 자유롭기 위해 투쟁하는 진보운동의 독자적인 정보인프라를 확보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아래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한국사회의 요원한 과제로 여겨졌던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가 DJ의 집권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IMF 신탁 통치 이후 진행된 자본의 공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지위와 권리는 끊임없이 약화되고 있으며 정부의 제반 정책의 우선 순위가 자본 위주로 재조정되는 등 실질적 민주주의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으며 민중들의 생존권은 여전히 위협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함께 87년 이후 지속된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노동운동을 비롯한 계급대중운동으로 분화되고 있으며, 다양한 부분운동의 확산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각 영역에 존재하는 진보운동의 힘이 모여 상승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분산되어 전체 진보운동의 합력이 형성되지 못한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또한 IMF 사태는 일국적인 시야와 대응으로 풀릴 수 없는 사회운동의 과제가 존재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연대의 관점과 전망이 필요함을 아울러 가르쳐 주고 있으나 이러한 요구들에 대한 진보운동의 준비와 대처는 대단히 미미한 상황이다. 따라서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새로운 사회적 연대전선을 구축하여 진보운동의 개별화를 극복하고 진보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도모하기 위하여 사회운동과 사회운동, 사회운동과 대중, 개인과 개인 그리고 국내운동과 타국의 운동을 이어주는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사회운동의 새로운 전진과 연대운동의 성장발전에 기여 하고자 한다.
진보적 사회단체들이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대표적인 방식은 상업통신망에 CUG(폐쇄 이용자 그룹)를 운영하거나 인터넷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민주노총은 나우누리에 CUG를 운영하고 있으며 1300여 회원이 CUG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민주노총은 전자적인 문서수발과 온라인 토론 등을 이용하여 네트워크를 조직활동에 활용하고 있으나 매월 1천만원에 달하는 운동자산이 미디어자본에게 넘겨지는 것에 비해 사회운동단체라는 특성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으며 인터넷 홈페이지를 위해 따로 투자를 하여야 하는 등 제공받는 것에 부족함이 많다. 또 규모가 크지 않은 사회단체들에게 상업통신망의 CUG는 아직 문턱이 높은 서비스이며 홈페이지나 메일링리스트 등 인터넷 서비스를 활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번거롭고 어려운 작업인 것이 현실이다.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사회운동의 정보화에 필요한 기술과 자원을 스스로 구축하여 네트워크를 유지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만으로 사회단체들이 PC통신 서비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서비스까지 손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이에 필요한 기술지원과 정보화 자문을 제공할 것이다.
상업통신망과 인터넷의 곳곳에 진보적 사회운동의 진지가 존재한다. 어떤 것은 CUG(폐쇄이용자그룹)의 모습으로 또 어떤 것은 IP(정보제공자)의 모습으로 존재하며, 또 인터넷 홈페이지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도 있다. 이들 모두는 네트워크를 활용하고자 한 진보운동의 성과물들이나 CUG와 진보적인 IP들이 여러 상업통신망에 분산되어 있으며, PC통신 서비스와 웹도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찾기조차 어려운 형편이며 여러 정보들이 상호긴밀히 결함됨에서 기대할 수 있는 상승효과을 얻기는커녕 유지 구축을 위해 들인 노력만큼도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이러한 진보운동의 정보화 성과물들을 진보운동의 독립된 정보인프라 위에 수렴하여 보다 용이한 접근과 활용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현재 많은 사회운동단체들이 뉴미디어자본의 통신서비스를 정보인프라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정보운동의 독자적인 정보인프라가 없는 상황에서 네트워크를 활용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진보운동이 자신의 대의와 원칙에 걸맞게 네트워크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네트워크가 필요하며 이의 이점은 다음과 같다.
진보운동의 원칙 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진보네트워크센터만이 검열과 표현, 통신의 자유 제한과 같은 권력의 개입에 맞서 싸울 수 있다. 지난해 5월 전 통신망에서 이루어진 한총련 아이디 사용중지 및 게시물 삭제 사건, 안기부에 의한 개인메일 검열 의혹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 상업통신망은 권력의 개입으로부터 표현과 통신의 자유를 지켜내는데 많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한계는 진보운동의 독립네트워크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상업통신망의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이윤을 위해 구축된 서비스로서 진보운동이 원하는 그리고 가능한 정보통신서비스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 이윤이 아닌 진보운동의 강화라는 목적 하에 운영되는 진보운동의 정보인프라 위에서는 진보운동의 요구와 조건에 맞는 다양한 서비스가 개발되고 구축될 것이다.
[진보네트워크센터 20주년 선언문]
1998년 11월 14일, 진보네트워크센터(진보넷)은 ‘사회운동을 위한 독립 네트워크의 구축’을 기치로 출범했습니다. 검열과 감시가 없는,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네트워크를 꿈꾸었습니다. 진보적 사회단체의 정보화도 도와주고, 분산되어 있는 진보운동의 자료들도 모으고, 이를 통해 진보운동의 각 부문간의 소통, 대중과의 소통을 되살려 사회적인 연대전선을 새롭게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그동안 진보넷은 사회운동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왔습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면 서버를 지키며 뜬 눈으로 함께 밤을 지새웠습니다. 용산 참사 철거민 투쟁, 쌍차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 세월호 참사 청문회 등 우리 사회의 굵직한 투쟁들을 뒤에서 지원해왔습니다. 인터넷 초창기 홈페이지 제작 교육에서부터 지능화된 감시에 대항하는 보안 교육까지, 우리가 기술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량을 강화하는 기술이 될 수 있도록 진보넷은 교육과 자문을 해 왔습니다.
진보넷은 한국 정보인권 운동의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인터넷 검열과 실명제, 주민등록번호 변경, 기지국 수사와 위치 추적, 국정원의 패킷 감청까지 권력의 검열과 감시 체제에 위헌 결정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전자주민증 반대 운동으로 시작된 한국의 프라이버시 운동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반대 투쟁을 거쳐, 2011년 개인정보보호법 제정이라는 결실을 맺었고, 이제 독립적인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설립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이 진보넷에서 태동했던 대안 미디어 운동은 민중언론 참세상으로, 연구 사업은 정보인권연구소로 확대 발전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진보넷만 변화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인터넷은 공기와 같아졌고 모바일 시대를 지나 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인터넷 상의 지식과 정보는 폭증했고 편의를 위한 신상품과 서비스가 쏟아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년의 기술 진보가 고스란히 삶의 질의 향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IMF 직전에 시작되었던 불안정 노동의 증가는 삶의 불안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심화되고 사람들은 무한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소위 4차 산업혁명은 신산업에 대한 희망보다는 실업에 대한 공포로 먼저 다가옵니다. 몇몇 IT 공룡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플랫폼 독점은 심화되고 있습니다. 빅데이터와 사물인터넷, 그리고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 신세계는 프라이버시의 죽음을 담보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상 생활과 사회적 관계가 기록되고, 시스템 뒤편에서 거래되고, 나를 평가하고 분석하는데 이용됩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 모든 과정이 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랍의 재스민 혁명과 한국의 촛불 집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고도화된 IT 기술은 때로는 저항의 무기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국가와 기업 권력의 감시 능력을 확대하기도 합니다. 갈수록 지능화되는 국가와 기업 권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기반한 통제가 필요합니다.
지능정보사회에서 정보인권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기반입니다. 정보가 권력인 사회에서 정보인권은 정보에 대한 통제권을 소수의 기업과 국가권력이 아니라 민중, 시민, 이용자, 소비자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보넷은 개인정보의 상품화가 아니라 정보주체의 권리 보장을, 정보와 지식의 독점이 아니라 공유를, 표현의 검열이 아닌 자유를, 소수 권력이 통제하는 인터넷이 아니라 개방적인 인터넷을, 권력 기관에는 더욱 투명한 공개를, 그리고 참여와 협력에 기반한 민주적 거버넌스를 주장합니다.
지난 20년이 한국 사회에 정보인권을 싹틔우는 과정이었다면, 다가올 10년은 정보인권이 더욱 성장하고 꽃 피울 수 있도록 진보넷이 앞장서겠습니다.
그리고 함께 가겠습니다. 연대의 가치를 놓지 않겠습니다. 회원과 후원자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지가 없었더라면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네트워크의 구축과 정보인권 활동은 없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노동, 인권, 시민, 언론, 소비자 단체 등 진보적 사회운동과 연대하겠습니다. 국제적인 정보인권 단체들과 인터넷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협력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스무살 진보넷, 보다 성숙하게, 보다 패기있게 활동하겠습니다.